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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세문단세

태. 정태세문단세. ㅈ. ㅗ. 예성연중. 임명선. 해군. 광. 인효현숙경영. ㅅ. ㅓ. 정순헌철고순. ㄴ.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친 왕. 목차. 광해군 [ 光海君 ]. 광해군의 세자책봉.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세자에 책봉. 광해군은  권섭국사의 직위를 맡아 분조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 . 평안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 .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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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태세문단세 ㅈ ㅗ 예성연중 임명선 해군 광 인효현숙경영 ㅅ ㅓ 정순헌철고순 ㄴ

  2.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친 왕

  3. 목차

  4. 광해군[ 光海君 ] 광해군의 세자책봉 세자 책봉 문제로 임해군과 갈등.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세자에 책봉. 광해군은 권섭국사의 직위를 맡아 분조의 책임자로 평안도 지역으로 출발.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 서울을 수복한 후 무군사의 업무를 담당하여 수도 방위에도 힘을 기울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전쟁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5. 주변 국가 상황 • 후금 건국(1616) 누르하치가 만주일대의 여진을 통합하여 ‘금’ 을 건국. 명을 위협. • 명 쇠퇴 쇠퇴 원인: 전쟁의 휴유증, 만력제30년 태업 후금의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원군 요청.

  6. 만력제30년 태업 • 만력제(萬曆帝,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휘는 익균(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융경제의3남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 30년간의 업무거부 -1584년,장거정 비리사건 이후 정치판에 관한 환멸을 느낀건지, 30년간 여러가지 구실을 대며, 업무를 거부,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갔다

  7. 광해군의 전후 복구 사업 1.국가 재정 회복(세금, 군역) 2.국방 강화 3.대동법 실시 4.동의보감 간행 5.사고를 다시 갖춤

  8. 대동법 조선시대에 공물(貢物: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9. 광해군의 중립 외교 • 명과 의리를 지키면서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함. • 강홍립을 명에 파견 -적극적 활동을 자제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지시

  10. 강홍립 1619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富車)에서 대패. 강홍립은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적진에 통고한 후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항복. 이는 현지에서의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투항한 이듬해인 1620년 후금에 억류된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적진에 볼모로 있었지만 밀지를 보내 후금을 상황을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

  11. 김개시 • 광해군 시대에 조선의 3대 악녀 • 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여 후궁도 아닌 것이 • 다만 김개시가 총명하고 정치에 조언을 잘 해서 총애했다는 말도 있다. • 김개시는 본래 동궁전, 즉 광해군 세자 시절 동궁전의 궁녀였다가 • 선조의 궁녀 자리로 옮겼는데, 때문에 선조와 광해군 사이를 잘 중재했다고 한다. • 선조가 노년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 할 때 광해군을 도왔다. • 광해군 때 후궁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다가 나중에 관직을 돈받고 파는 부정부패를 저지르기도 했고, • 광해군 시절 역모 모의가 여러차례 있었는데 광해군을 안심시키다가 •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쫓겨났고 김개시는반정군에 잡혀 참수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광해군이 김개시를 총애했다 김개시가 활동을 했다. 라 는

  12. 인조반정(1623) • 광해군의 중립외교 •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불만(폐모살제) •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

  13. 인조반정 그후… 서인이 집권-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 친명 배금 정책 외교 정책은 당연히 후금의반발. 후금은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으로 쳐들어옴[정묘호란(1627)]. 형제 관계를 맺고 되돌아감 청의 요구를 일단 들어주고 장기적으로 힘을 길러 청을 치자는 세력(주화파)청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으니 차라리 전쟁을 하자는 세력(주전파) 주전파의목소리가 더 커서청의 군신 관계 요구를 거절 다시 청이 군대를 동원하여 쳐들어옴[병자호란(1636) 주화론자 최명길을 내세워 청나라에 강화를 요청했지 삼전도 굴욕(삼배구고두)

  14. If 인조반정이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15. 전쟁 종료 후

  16. THE ND A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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